사진 게시판에 올리신 '섬김이'님의 글입니다.
  글쓴이 : 예수원 날짜 : 08-02-11 17:27     조회 : 10361    
예수원에 다녀와서

반복되는 일상, 까칠할 때로 까칠해진 최악의 해 2007년, 2003년부터 바뀌지 않는 학교 업무,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학교, 삶의 방향감각 상실, 교장의 늘 새롭게 반복되는 억지, 영적으로 무뎌진 상태.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이 곳 예수원으로 오게 했다.

2007년 7월 26일 아침 10시, 청량리역에서 태백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대학 1학년 때였던가.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여행을 가는 건 그 때 이후 처음인 것 같다. 달콤한 외로움.

기차 안. 여행이 주는 몽롱한 행복감. 현실의 ‘나’는 사라지고 꿈 속에 와 있는 듯한 느낌.
기차의 낭만. 느림의 미학. 끊임없는 초록의 아름다움. 비가 내리지 않는 맑은 하늘. 아, 다행이다.

켄 가이어의 ‘영혼의 창’을 읽는다. 고등학교 시절 ‘생명의 삶’에 연재된 그의 글을 읽었을 때의 설레는 마음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 때는 그리 순수했건만, 지금 나의 마음은 회색빛 하늘이다. 그 때의 순수했던 영적 감수성을 회복하고 싶은 열망.

학교에 대해, 교장 선생님에 대해 불평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방학을 맞아 이런 여유를 즐길 수 있음에 감사의 마음이 생겨난다.

기차의 에어컨. 청바지를 뚫고 다리가 시릴 정도의 강한 바람. 자연에 순응하지 않는 문명의 이기주의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기차가 가는 내내, 지루해 하며 못 견디는 젊은이들. 천천히 가는 것을 즐기지 못하고 참을성이 없는 요즘 아이들. 이런 아이들이 이끌어 갈 미래는 어떠한 모습일까.

2시. 태백역 도착. 태백산의 위엄에 겸허해진다.
하사리가는 버스를 탄다. 고지대의 태백 정경. 60-70도는 되는 듯한 가파른 산지에서 자라는 배추들. ‘19세’라는 드라마에서 본 배추밭 광경이 끊임없이 펼쳐져 있다. 논밭에 익숙하지 않은 도시인인 나는 자연이 주는 엄청난 장엄함에 매료되어 버린다.

예수원역 도착.
예수원까지 걸어가는 길. 인터넷으로 미리 보았던 바로 그 길이다!

이제부터 2박 3일의 짧은 수도원 생활이다. 여름이지만 꼭 긴 바지를 입어야 하고 양말을 신어야 한다. 핸드폰은 물론 반납이다. 세상과의 단절. 알프스에 온 것 같은 느낌. 서구적인 집 풍경들. 마음대로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인 티룸. 맑고 깨끗한 물. 도서관. 조용히 묵상하며 기도하는 소기도실. 묵상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낭만적인 의자. 갑자기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가 떠오른다. 나는 이 곳을 잘 견뎌낼 수 있을까.

6시 저녁식사. 된장찌개, 김치, 가지나물, 보리섞은 밥. 윤오영의 ‘부끄러움’에 나오는 표현처럼 정말 ‘상차림은 간소하나 정결하고 깔밋했다’. 그야말로 웰빙 식단이다. 이것만 먹고 생활하기란 배고플 것 같지만, 어쩌겠는가. 식욕을 절제하고 주는 것만 먹을 수밖에.

개인에게 지급되는 깨끗한 흰 시트 3장, 예수원 섬김이들의 정돈된 깔끔한 봉사의 모습이 감사하다.

환경오염에 대한 그들의 가치관. 물을 아껴쓰고 샴푸와 세제를 사용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이 귀감이 된다.

7시 저녁 은사예배. 기대감을 갖고 첫 예배를 드린다. 함께 둘러앉아서 인도자 없이 성령이 주도하시는 예배란다. 한참 이슈가 되고 있는 탈레반에 납치된 선교사들, 탈레반의 지도자들, 북한 사역, 중남미 선교를 위해 서로의 생각들을 나누며 기도의 시간을 갖는다. 원수를 사랑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기도. 사울이 바울이 되었듯이 탈레반의 지도자들이 변화되기를 원하는 기도를 드린다. 이 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결코 드리지 못했을 기도다. 예수원은 단순히 쉼을 얻는 공간이 아니라 중보기도하는 공동체라는 안내하시던 분의 말이 떠오른다.
예수원은 성령을 중요시해서 감정적인 예배를 드릴 줄 알았는데, 지적으로 절제된 예배였다. 찬양도 감정에 호소하듯이 지나치게 반복하지 않고 두 번 정도만 진심으로 부르는 것이 마음에 든다. 나눔과 기도의 열기가 끊이지 않은 가운데 자유스럽게 그 자리에서 나올 수 있었다. 나도 12시 정도까지 참석한 후, 내일을 기약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날, 5시 30분 기상. 30번(?)의 끊임없는 종소리에 잠이 깨다.
새벽예배. 천주교의 냄새가 난다.
시편, 구약, 신약 3부분을 읽으며 묵상한 후 자유롭게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데는 유익한 듯 하나, 체계적이지 못한 성경공부는 자칫 감정적이고 주관적으로 흐를 수 있겠다는 우려가 든다.

아침메뉴는 미역국과 두부. 맛있다.

8시. 노동시간. 기도는 노동이요, 노동은 곧 기도라는 대천덕 신부의 말씀. 단체로 온 이들은 노동을 하러 모이고, 나는 기도와 쉼을 얻기 위해 이번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나서인지 조금 졸립다. 30분 정도 취침을 한 후, 샤워를 했다. 시골답지 않게 따뜻한 물이 나오고, 수세식 화장실인 것이 감사하다.

오전 시간. 가져간 디카로 사진을 찍으며 산책을 한다. 대천덕 신부의 자서전과 초등부 교사들과 가족에게 줄 책갈피를 구입했다.
모두들 한적하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독서를 하거나 기도를 한다.

어제에 이어 좋은 날씨를 주심에 다시 한 번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장맛비가 왔더라면 이렇게 맑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을 느끼지 못하고 실내에서만 있었을 텐데. 하나님께서 나의 피곤해 지친 삶을 위로해 주시기 위해 선물을 주신 것 같다.
바람의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마치 아름다운 음악 같다. 아, 그런데 배가 고프다.

12시 예배. 중보기도의 시간.
사제가 중보기도를 하면, 회중들은 “주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라고 특유의 리듬을 실어 화답한다. 예전에 성당에서 하는 결혼식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 때도 이런 식이었던 것 같다. 형식에 꽉 짜맞추어진 기도가 조금은 어색하고 지루하다. 그러나 구체적인 중보기도의 내용은 회중들에게 영적인 유익을 주는 것 같다. 선교사들 한 명 한 명을 위한 구체적인 중보, 북한을 위한 간구, 우리나라의 교회, 사회, 교육문제에 이르기까지 아주 구체적으로 드려지는 기도에 많은 도전을 받는다.

12시 40분 점심식사. 생선, 물김치, 상추쌈.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 식단이다.

하나님께 집중하니까 미워하는 교장선생님을 위해서도 기도가 된다.
침묵하며 기도하며 독서하는 청년들의 모습도 많은 도전이 된다.
아, 이런 이들이 있기에 아직 세상에 소망이 있구나. 남은 자들.
서로 간섭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각자가 자유롭게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속에 풍요로움이 있음을 발견한다.

나는 벌레를 싫어해서 벌레를 보면 죽였었는데, 이렇게 자연 속에 사니, 나도 마치 자연과 한 몸인 양, 그렇게 더럽게 보였던 벌레와도 친구가 된다.
수많은 잠자리떼를 보니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드넓은 자연 속에 있으니 위대하신 하나님을 절로 찬양하게 된다.

시간마다 울리는 종소리가 형식적이고 답답하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예전에는 시계가 없어서 종을 쳤겠지만, 지금은 시계 정도의 문명의 혜택은 누려도 될텐데.
그러나 시간을 확인하지 않고 어떤 일에 몰두할 수 있는 경험은 나름대로 즐거운 것이었다.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독서하는 즐거움.
다음에 올 때는 맥심커피믹스와 비스켓 몇 조각은 꼭 가져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이 평안함을 세상 속에서도 충만히 누리며 살 수 있을까.
세상의 그 혼란 속에서도 묵묵히 사람들을 섬기며,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하며 살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진다.

6시 저녁식사. 김치, 된장국, 잡채.
점심부터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 먹는게 없어 배고프다고 생각했는데 속이 더부룩하다. 산책도 많이 했는데 왜일까 생각해보니, 이제 알았다. 보리밥 때문이었구나.

저녁예배는 방별로 드리는 구역예배이다.
8월에 이란으로 파송되시는 목사님께서 인도해 주셨다. 개개인의 기도제목을 나누기 원했는데 목사님의 일방적인 설교로 진행되어 조금 아쉬웠다.
그러나 목사님을 통해 이슬람 국가의 우리나라에 대한 엄청난 선교 전략을 들으며 영적인 전쟁의 무게를 새롭게 느끼게 되었다.
현실 속에서 안락함만을 추구하며 사는 나의 모습은 얼마나 이기적인가.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적인 복 아닌가.

다시 밖으로 나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에 하나님과 대면한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나는 진실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는가.
내 속사람으로부터 진정 그렇게 소원하는가.
만약 그랬다면 내가 이렇게 우유부단한 삶을 영위해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작 2박 3일간 이 곳에 머물렀다고 내가 성령충만한 삶을 지속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계속적인 기도생활, 말씀묵상을 통해 영적으로 깨어진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나 자신의 문제에만 골몰하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지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가슴으로, 삶 전체를 통해 역동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 것인가.
“하나님! 나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원하십니까?
제가 어떤 부분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될 수 있겠습니까?
제게 알려 주옵소서!“

새벽.
간밤엔 추웠다. 어젯밤에는 더웠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새벽에 라디에이터가 틀어져 있는 것을 보니, 이 곳이 고지대라서 춥기는 추운 곳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이 곳에는 선풍기와 에어컨도 없다. 정말 자연의 시원한 바람만으로 여름을 날 수 있는 곳이다. 셋째 날까지 좋은 날씨 속에서 보내게 하심을 다시 한 번 감사.
 
이렇게 예수원에서 모든 예배를 다 드려보았으니 정리를 해보자.
아침은 천주교 찬송, 점심은 개신교의 찬송가, 저녁은 최근에 나온 찬양을 드리며 모든 형식의 찬양을 두루 부른다. 성경도 개정판과 표준새번역을 모두 사용한다. 기도의 모습도 묵상기도와 사제와 성도간의 화답기도, 그리고 통성기도가 모두 사용된다. 과거의 전통과 새로운 방식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형식으로 예배가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분위기는 수도원 같지만, 그 속에 담긴 신앙의 모습은 전혀 관습적이지 않다. 오히려 선교지향적이며 지적인 절제를 갖춘 뜨거움이 있다. 성경적 토지 정의 실현을 위한 개혁적인 모습은 생소하기까지 하다.
그들은 요즘의 교회보다 더욱 포괄적이고 넓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다. 개인적인 성공과 복을 구하는 세속적인 기독교보다, 선교나 사회적인 정의가 실현되기를 기도하는 그들의 모습이 훨씬 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8시. 예수원을 떠나는 길.
태백으로 갈 때는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득 찼었는데, 이제 서울로 가려하니 두려움, 삶에 대한 긴장, 아쉬움이 가득해진다. 아,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 수 있을까?

마지막 손님부에서 핸드폰을 돌려 받으며 헌금을 하려고 했는데, 절차가 너무 빨리 끝나고, ‘안녕히 가세요.’라는 인사를 듣는 바람에 당황한 나머지 헌금 드릴 기회를 놓쳐 버렸다. 소심한 성격에 다시 찾아가 헌금을 할 수도 없어 그냥 나와 버렸다. 계속 빚진 마음.
그런데 갑자기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

예수원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길.
이 곳에서 본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가 모두 소중하다.

9시, 기차를 타다.
너무 서둘러 온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제 나에게 주어진 치열한 삶을 이제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의 소음들.
죄가 없는 신성한 곳에서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어떤 면에서 예수원에 있는 그들은 세상과의 거리 때문에 보호되어 있지만, 나는 세상의 최전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외치며 세상의 죄와 싸우며 살기에 더 위대할 수 있다.
내가 이곳에서처럼 매일 기도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나는 승리할 수 있다!
이제 새로운 에너지를 받았으니 새 마음으로 열심히 살자.
예수원에서 보았던 모든 장면들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자.
바쁜 중에도 항상 기도하고 안식을 누리며 살자.

기차 안. 10시 경 허기짐을 느끼며 바나나우유와 초콜릿을 사서 허겁지겁 먹다.
이틀 간의 수도생활 중에 나는 단맛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난 세속적인 인간인가 보다.

예수원을 향해 올 때는 눈을 떼기 힘들었던 기차 밖의 산과 들의 초록의 풍경이 이제는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다음에 올 때는 친한 친구와 같이 오면 더 좋을 것 같다.

대천덕 신부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그의 개척자 정신을 생각하게 된다.
어떻게 기존의 삶을 답습하지 않으면서 내 인생을 새롭게 개척해 갈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개인주의적인 신앙을 극복하고 공동체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 몸을 이루어갈 수 있을 것인가.

기차 안에서 졸다보니 벌써 청량리 역이다.
사람이 무지하게 많다. 누군가 껌을 딱딱 십는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들린다. 게다가 태백에서와는 달리 너무 덥다.
수많은 사람들, 소음, 더위와 기계 냄새가 어우러진 기분 나쁜 느낌, 더러운 바닥, 이 모든 것이 이제는 내가 세상에 왔음을 실감하게 한다.

예수원에 간 것이 정말 꿈만 같다.

<후기>
2007년 여름에 예수원에 갔다 오고, 정말 바쁘게 살다가, 2008년 2월이 돼서야 옛날의 메모를 보고 글을 정리해 봅니다.
가끔 힘들 때 예수원의 정경을 떠올리면 마음이 평안해 지곤 했습니다.
이런 소중한 경험을 하게 해 주신, 예수원의 값없는 수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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